Q. 개발자(프로그래머)가 된 이유는 무엇이고, 처음 개발자(프로그래머)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유랄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이유인데 대학교 진학을 “공대” (정보통신공학과)로
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올라왔던 글들을 보니 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컴퓨터를 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솔직히 우리 집은 그리 잘 살지 못해 컴퓨터를 처음 접한 건 수능 시험 끝나고 동네 친구가 반 강제적으로 데려갔던 컴퓨터 학원에서 DOS 한달 배운 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서 대학교에 들어갔더니 과방에 286, 386, 486 컴퓨터들이 주루룩~~ 놓여 있고 다들 컴퓨터들
앞에 앉아 경쟁적으로 한메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자판을 배워본
적도 익혀본 적도 없어서 독수리 타법으로 두드려 봤는데(사실 지금까지 나름 독수리 타법이다. 다만 익숙해져서 쓰고 있을 뿐) 별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까지 이론으로만 배웠던 물리 공식들을 실제로 경험해 볼 수 있었던 빨간 공과 하얀 공의 상관관계가
나에겐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재미를 느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빨간 공과 하얀 공의 상관관계로 엮어진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당구장(헉!)에서 정말 친해진 나를 포함한 4명이 일명 ‘4군자’라는 모임을 조직했고 다마 수(편집자 주: 순우리말로 뭐라고 하나요???)대로 매, 난, 국, 죽 호칭을 사용했으며 대학교 들어가서 처음 큐대를 만져 본 나는 당연히 竹 이었다. 그 4군자 멤버들이 게임 끝나고 당연히 마시는 술 자리에서 “우리 다른 과목은 몰라도 그래도 공대생들인데 Turbo C 정도는
해야 되는 게 아니냐?”라는 의견이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여 결국 그 다음 날부터
그러다 같은 과방 한 켠에 놓여져 있던 Sun Classic Workstation 4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라클로 합병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서 출시한 웍스테이션으로 그 당시 Sun OS 4.x 가 올라가
있던 웍스테이션에 눈길이 갔던 이유는 그 당시 컴퓨터들은 대개 본체 위에 작고 볼록 튀어나온 모니터가 올라가 있었던 반면 웍스테이션은 20인치 급 평면 모니터가 올라가 있는데다 처음 보는 3버튼 마우스에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키보드까지… 그야말로 판타스틱 한 하드웨어에 눈이 멀었다.
그렇게 웍스테이션과의 사랑에 빠져 어떻게든 건드려 보려고 했는데
그 당시 그 웍스테이션들이 바로 근처에 있던 연구소에서 기증 받은 대당 천만원 이상씩 하는 고가 장비라 92학번
선배들 외에는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학교에서 밤을 새기 시작했다. (다행히 과방이 장판이 깔려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딱딱하긴 하지만 잘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그렇게 밤 늦게까지 남아 있다 보면 웍스테이션 자리가 하나씩 비게 되고 그때마다
살짝 건드려 보다가 그걸 보던 92학번 형님 한 분이 제 개인 홈페이지를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 선물(?)해 주셨는데, 진짜 깜짝 놀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홈페이지였지만 그 당시 94년도에는 네스케이프(Netscape) 브라우저도 나오기 전이어서 모자익(Mosaic)으로
심슨 아이콘 누르면 노래가 나오고 내가 올린 내용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단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웹 프로그래밍에 빠졌다. 밤을
수도 없이 새다가 아예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HTML 책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해외 사이트에 접속해서 [소스 보기] 메뉴를 통해 실제 소스를 그대로 따라 하면서 공부할 수 밖에 없었고 그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던 사이트들이
공료롭게도(?) 해외 성인 사이트들이었다. 웹 브라우저에서
실행되는 JavaScript들의 새로운 용법들은 대부분 거기서 먼저 시작되었다. 처음엔 HTML 코딩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Perl과 C 언어를 사용하여
CGI(Common Gateway Interface) 프로그래밍으로 게시판과 자료실을 만들어보고 나중에 mSQL이라는 RDBMS로 회원관리 프로그램까지 만들다 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개발자 인생은...
그러다가 95년도에
워크스테이션에서 코 밖에 없는 이상한 형태의 캐릭터가 웹브라우저 같은 프로그램에서 덤블링 하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바로 Java 캐릭터인 Duke였다. 덤블링도 하고 목 메다는 게임도 하고 화학 분자 모형을 3D 입체
모형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Java라는 언어가 무척 신기해 보였다. 그래서
또 밤을 새가며 Java를 공부했고 결국 2000년까진 Java로 밥을 먹고 살았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처음으로 Windows의 레지스트리 접근을 Java로 해보고 그 당시 Install Shield라는 setup.exe를 생성해주던 프로그램이 Java를 지원하지 않아
인터넷을 검색해서 간신히 찾아 낸 InstallAnywhere로 설치 프로그램(setup.exe)까지 만들어 보면서 많이 배웠다.
그러다가 네트워크 장비 업체에 스카웃 되어
Java 기반으로 원격에 있는 네트워크 장비들을 모니터링 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Web 기반의 NMS(Network Management System)를 개발하러 갔다가 거기서 처음 장비용 소프트웨어를 접하게
되었다. 바로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였다.
내가 구현한 코드 때문에
LED가 깜빡 거리는 걸 보고 그대로 그때까지 밥 먹고 살던 Java를 버리고 C와 Assembly로 빠지게 되었고 결국 나중에 하드웨어 회로도까지
그려 본다고 OrCAD를 모르니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파워포인트로 회로도를 그려 만든 제품이 해외
수출까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나처럼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에 맨땅에 헤딩하는 삽질을 줄여 줄 수 있는 D.I.Y. (Do It Yourself)
기반의 스스로 체험해가며 배울 수 있도록 설계된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교육용 키트인 DK128(D.I.Y.
Kit AVR ATmega128)이라는 아이템으로 벤처창업경진대회 중소기업청장상을 수상하면서 창업의 길을 걷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적다 보니 별거 아닌 내용을 무척 길게 나열한 듯하다. 결국 이렇게 길었던 내용의 요지는 내가 개발자가 된 이유는 특별하게 없었지만,
개발자를 꿈꾸게 된 계기는 “재미있어서”였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그때 정말 우연히
프로그래머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사람이 게임을 만드는 것도 대단한데 다른 회사에서 만든
게임들을 자동으로 컨트롤 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그런 프로그램을 작업장들에 납품하며 한 달에 많게는 몇 천만원씩 벌고 있는 형들을 보았지만
솔직히 그런 프로그램보다 그 형들이 벌고 있는 돈에 더 놀랐다. 그래서 결국 당시 가지고 있던 돈의
욕심으로 결국 프로그래머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스무 살에 모든 것을 버리고 프로그래밍에만 올인하면서
‘나도 저런 돈을 벌 수 있을거야’라는 허황된 꿈들을 꾸었던
것을 보면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제일의 가치가 돈이라는 것에 대한 무언의 영향을 받았던 거라 생각된다.
프로그래머가 된 계기는 그러했지만, 그 뒤에는 대학 대신 선택한 길이 옳은 것이라는 자신의 위안을 위해서 보다 소박하게 일하며 공부하였고
그 경험들로 만들어진 IT에 대한 몇몇 큰 그림들을 통해서 이제는 세상이 IT와 함께 어떻게 움직이고 만들어지고 있는지 관찰하면서 살고 있다.
매우 건전한 내용을 적고 싶었지만 나처럼 그저 흘러가듯이 프로그래머가 된 사람도
분명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써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서 컴퓨터를 사주셨다. 사교적이지 못하고 매사에 당당하지 않은 성격이었던 나에게 컴퓨터는 너무나도
만만한 상대였다. 모니터만 쳐다보며 열중하고 있으면 아무도 말을 잘 걸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게 너무 좋았는데, 컴퓨터를 모습이 한가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게임플레이 하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고 키보드를 많이 타이핑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그 시절에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임, 글을 쓰는 작업, 프로그래밍
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중에 프로그래밍이 걸린 것이다.
그런 연유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컴퓨터학원을 등록해서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머리가 좋지는 않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반에서 프로그래밍을 잘하는 편에 속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컴퓨터부에도 들어가 마음 맞는
친구와 늦게까지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느 경시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난데없이
친구들과의 교제가 많아지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프로그래밍을 놓아버렸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을
해야 하게 됐는데 할만한 게 하나도 없어서 다시 프로그래밍을 하기로 하고 컴퓨터 관련 학과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너무나도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과 학교가 원하는 활동이 동일해졌기 때문이다. 밤을 새고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면 부모님도 좋아하고 교수님도 좋아하고 나도 좋았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후에 뭔가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
그저 뭔가에 열중한다. 중간에 학교가 회사로 바뀌어서 사장님도 좋아하고 돈이 벌린다는 것이 다를 뿐
큰 변화는 없었다. 프로그래밍 실력이 크게 향상된 계기가 몇 번 있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아무런 특징이
없었고 그저 삶에서 프로그래밍에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보니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거창한 계획도 비전도 없이 뭔가를 시작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겁도 많고 인내심도 없어서 내가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을
반복하며 프로그래밍을 즐겼다. 팜빌에서 토마토 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프로그래머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처음에 내가 꾸었던 꿈은 개발자나 프로그래머라는 구체적인 목표라기 보다는 기업의 전산실에 취업해서 급여를 받는 일을 했으면 하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안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고, 고등학교도 장학금이 아니었으면 다니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신문배달, 주유소 알바, 추석이나 설 때에 선물박스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친한
친구 중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도 힘들어하지 않는 친구를 보면서 부모님이 두 분 모두 곁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그 친구에 비해서 매우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가장 힘든 아르바이트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에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아파트 공사장에서 배선이
잘못된 아파트현장의 벽을 해머로 부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때, 일을
하면서, 정말 열망하던 꿈은 깔끔한 와이셔츠를 입고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직업뿐이었다.
처음, 중학교2학년 때에 정보처리기능사2급을 취득하던 것도, 취업하게 되면
Cobol을 기업에서 사용한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취업 때에 자격증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컴퓨터프로그래머라는
직업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에 청계천을 다니면서부터였다. 당시의
청계천에 하드웨어 아트워킹에 필요한 IC를 구하러 가면서 발견한 세계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회사 전산실 이외에도 컴퓨터의 또 다른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세계였다.
별천지와 같던 청계천에서 컴퓨터 부품을 팔거나, 당시, 청계천
옆에 광운백화점이라는 곳에서 전자부품이나 IC칩을 보러 다닐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내 운명을 또 한 번 바꾼 것은 지금도 기억나는 당시 RM-Cobol과 MS-Cobol기반의 개발환경을 접하면서부터이다. Run-time환경으로 동작하는 RM-COBOL보다는, 원래, ASM코드로 Z-80코딩을
다루던 나였기에,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바이너리 코드의 접목이 수월한
MS-COBOL이 나에게는 훨씬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다.
당시 책을 구하기 어렵고, 책도 비싸던 시절이어서 고등학교시절에는 인하대학교 뒷 편의 서점에서
복사된 소프트웨어관련 강의자료들을 구해서, 컴파일러 이론과 Linker이론을
공부했었고. 청계천에서 구한 MS-COBOL의 3권의 매뉴얼은 개인적으로 소프트웨어의 깊이를 정말 알게 해주었다.
당시에 구해봤던 3권의 MS-COBOL 3.0의
원서는 나를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생활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다른 컴파일러로 만들거나 Asm코드로 바이너리 모듈을 만든 내용도, MS-Cobol에서 MS-DOS의 21번 펑션콜이 되는 것을 확인하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사이에 Z-80과 8051을 다루는 프로그래머로
변해있던 나를 발견하고, 공사장에서 해머를 들던 모습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들고 있던 모습으로 변한
내 모습은 참 자랑스럽고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같은
나의 10대였다.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나는 취업 전
Oracle ERP를 사용한 재고관리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일정하고 똑같은 시간에 반복된
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작업을 자동화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개선사항을 정리하여 전산실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그 전산 담당자는 여자 개발자였는데 나를 옆에 앉히고는 에디트
플러스(Edit Plus)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로 내 개선사항을 바로 적용하였다. 낯선 언어를 통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걸 본 순간 ‘내가 앞으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를 계기로 컴퓨터공학과로 편입하고 본격적인 개발자 되기에 돌입했다. 전공을 바꾼 후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토너처럼 앞만 보며 즐겁게 달렸는데 막상
개발자가 되고 보니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됐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커뮤니티를 찾아 기술적인 갈증은 다소 해소했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늘 아쉬웠다. 기존 커뮤니티들이 남성 개발자 위주이다 보니 나의
상황과는 다소 거리감도 있고 여성만의 섬세함을 맘껏 발휘하기엔 제약도 적지 않았다. 때때로 너무 힘에
부칠 땐 무작정 달려가 툴툴거릴 수 있는 친정 같은 공간이, 엄마 같은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 직장은 ‘회사 설립 이후
여자개발자 처음 채용’ 상황이었다. 무슨 특별한 권리라도
누릴 것 같은 포스지만 난 결코 남자개발자 사이에서 돋보이는 한 송이 붉은 꽃이 되지 못했다. 여자를
같은 동료처럼 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그들로 인해 금세 잠재적 외톨이가 되었고, 마치 영화 ‘토니 타키타니’의 주인공처럼 외로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군중 고독에
익숙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외로움은 급기야 묵은 때처럼 내 모습을 추레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목마른 상황 속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고, 알싸한 락스향처럼 개운한 자극을 받길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기어린
몽니도 다 들어줄 것 같은 영원한 내 편, ‘친정 식구들’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해주길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나의 바람을 직접 이루리라 마음
먹고
난 항상 여성 개발자들 간의 교류를 통해 늘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기술에 대한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커뮤니티를 통해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04년 한 여름, 나를 개발자의 길로 들어서게 한 아름다웠던 개발 코드가 아직도 선명하다. 글씨체도 잊을 수 없다. 난 아직도 개발할 때 그 글씨체를 사용한다.
초등학교 2학년 친구의 집에서 처음 컴퓨터를 접해본 이후로 항상 "나도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추상적이기는 해도 막연하게 처음 프로그래머로써의 꿈을 가지게 된 첫 번째 시기였던
것 같다.
97년도 대학입학을 앞두고
당시 계속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꿈을 위해서 ‘컴퓨터공학과’를
선택하였다. 당시 IT라는
(그것이 버블이었다 할지라도..) 것이 상당한 이슈였고,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결혼배우자 1순위가 IT직종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일 정도였기 때문에, 집에서의 거부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ROTC였던 탓에 졸업 후 군에 가고 군 전역 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의 취업준비생 과정을 거쳐 당시 작은 솔루션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원했던 개발팀이 아니라 기술지원팀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여전히 ‘개발이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기술지원팀의 업무는 상당히 힘들었다. 최첨단에서 고객을 직접 상대하며 개발팀이 만들어낸 버그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일을 하는 것이 기술지원팀이었다. 원하던 솔루션 개발은 하지 못 하였으나 유지보수
업무를 하면서 서버관리, DB관리, WAS 운영등 프로그래밍
외의 것들을 해볼 수 있었고, 개발자가 만들어낸 버그가 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고객의 폭발적인
짜증을 두 눈으로 보고 그 불평을 다 받아 볼 수 있는 경험도 했었다.
당시에는 몰랐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경험은 다시 하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실 또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도 아닌데, 그걸로 내가 욕을 먹는 것이 사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GS홈쇼핑에서 일을 하게 되었었는데 불특정 다수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쇼핑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이 좋았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공공기관 인트라넷에 사용되는 솔루션
유지보수를 해왔기 때문에 그런걸 느끼지 못 했었다.
아무튼 그걸 계기로 “아 내가 이런걸 좋아하는구나.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좋아하는 것을 내가 정말 좋아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동기가 되고 성취감이 되어 지금도 “난 정말 개발이 좋다”라는 생각으로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개발을 하며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프로그래밍 그러니까 소위 내가 머리 속으로 생각한 알고리즘이나 수식을 처음으로 코드로 구현해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흔히들 알고 있는 게임기는 게임 팩 없이 부팅하면 언제고 GW-BASIC 콘솔창을 보여주곤 했다.
초등학교 때 산수경시부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나는, 내가 생각한 수학 공식 등을 반복적이면서 그리고 오류 없이 계산할 수 있는 장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우연한 기회에 접한 컴퓨터는 나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컴퓨터라는 장비가 워낙 고가여서 부모님께 컴퓨터를 사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서 산수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금처럼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는 못했지만 주판으로 주로 처리되던 시험 성적이나 순위 등은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컴퓨터실에서 프로그램을 짜면서 성적을 누구보다도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영광의 기회가 갖게 되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 나가면서 더 폭넓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나의 관심은 더욱 커졌고, 대회에서 수상하면서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시골이었지만 운이 좋았던 점은, 당시에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어셈블리, 포트란, 코볼, C언어 등을 두루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다양한 매력이 있는 직업이지만, 무엇보다도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추신: 2부의 기재가 너무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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